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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 귀비와 비운의 황태자 영친왕♧
민비가 일본군에 살해 당한 후 고종과 함께
지낸 여인은 순헌황귀비 엄 씨 였다.
엄진삼의 큰딸로 철종 5년(1854년)태어났다.
8세에 입궐하였으나 민비에게 쫒겨 났다.
민비가 죽은지 5일 만에 고종의 명으로
재 입궐 하였다.
한편 조선총독부(일본)의 정략에 의해 입궐한
정하당 김씨는 고종의 얼굴 한번도 보지못하고
고종이 죽자 시신만 지키고 있엇을 뿐이다.
이때 엄귀비의 소생 이은(영친왕)의
나이는 23세 였다.
러시아공사관에 있다가 1년만에 돌아온
고종과 엄씨는 1897년 10월에 황제 즉위식을
갖고 국호를 大韓帝國(고종30년)으로 선포
하면서 왕후는 황후로, 왕세자는 황태자로
개칭 고종의 호칭도 저하에서 페하로 바꾸었다.
엄씨는 귀인으로 책봉되었다.
1900년 8월 아들 이은이 영왕으로 봉해지자
순빈으로 책봉되고 1901년 10월 빈으로 승격되어
고종의 계비가 된 것이다.
1907년순종으로 즉위, 엄씨의 아들 영왕이
영친왕인데, 이분이 비운의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이다. 엄귀비는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엄씨는 진명여고를 세울때 거액의 돈을
내 놓아 사실상 설립자 이다.
또한 양정학교 설립때도 중심적인 역활을 했다.
1911년 장티푸스로 58세로 졸 하였고
묘는 서울 청량리 홍릉의 영휘원에 있다.
엄씨가 나은 황태자 이은은 1907년 12월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유학 이란 명목으로
일본에 볼모로 잡혀 갔다.
당시엔 매년 한번씩 귀국할수 있다고 했지만
그는 돌아오지 못 했다.
1910년 순종이 페위하자 황태자는 황세자로 격하
되었고 1920년 일본 황실 정책에 따라 일본황족의
딸 마사코와 정략 결혼 했다.
1926년 순종이 죽자 형식상 왕위 계승자가 되어
이왕이라 했지만 일본에서 귀국하지 못했다.
그는 일본에서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거쳐
일본 육군 중장을 지냈다.
1963년 11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하고 부인 이방자와 함께
귀국 했다.
그후 이왕은 지병으로 1970년 74세로 졸 하였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흥유능에 묻혔으며
1989년 4월 30일에 이방자 여사도 함께 묻혔다.
약해진 국력 치욕의 국운.
,조선 왕조 실록에서

정 우 - 올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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